나는 대학시절 수시로 틈을 내서 여행을 가곤 했다. 어쩌다 보니 다 혼자 갔었다.
혼자서만의 여행이 처음은 막연하게 두려웠으나, 어느새 난 이에 대해 편안함을 느끼고, 지금은 홀로 여행이 아니다면 오히려 막막한 느낌이 들게 되기 마련이다.
여행을 가서 나는 주위 친구들에게 엽서를 보낸다. 나의 여행담과 친구들을 향한 나의 격려의 한마디를 적으면서.
그렇게 꾸준히 보내다 보니 지금은 나의 친구들이 나를 기억해주며 가끔씩 나에게도 엽서를 보내준다.
엽서를 받을 때 기분을 느낌으로 표현하자면 마냥 행복하고 기억에 남겨졌다는 사실에 감사를 느낀다. 그들도 이런 감정을 느낀 것일까?
고작 엽서 한 장일뿐인데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하다니.
엽서의 대한 나의 추억은 각별하다. 그중 하나인 시베리아에서 보낸 나의 엽서 한 장의 기억을 글로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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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16년 대학교 4학년 2학기, 나는 졸업예비생이었다. 나는 4월에 긴긴 중국에서의 학교생활의 종지부를 찍고 한국으로 귀국하기로 결심했다. 나의 주변 친구들은 의아했다. 나는 석사과정을 준비했고 따라서 다들 내가 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결정에 이어 나는 또 갑작스럽게 5월 황금연휴 때 6박 7일 바이칼 호수 여행을 결심했다. 3일 전에 티켓팅을 하고 바로 이르쿠츠크로 넘어갔다.
평소에도 여행 계획을 짜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더더욱 아무런 대책도 없이 간 터라 유난히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많은 결심이 필요한 터라, 스스로 낯선 상황과 장소로 몰아가지 않았나 싶다. 어쩌면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수도 또 어쩌면 모든 것에 대한 회피였을 수도.
어쨌든 나는 시베리아에 도착했고 이르쿠츠크에서의 하룻밤을 지내고 곧바로 다음날 리스트 비얀카로 향했다.
리스트 비얀카에서 바라본 바이칼 호수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나는 유난히 호수를 좋아한다. 호수를 바라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중에서도 바이칼 호수는 언젠간 꼭 들려보고 싶은 곳이었다.
날씨는 쌀쌀했고 기온은 낮에 15도가량인 것으로 기억난다. 밤에는 심지어 눈까지 내려서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다. 5월 초에 눈이라니!
호수 주변에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다. 그위에서 바라본 이색적인 유럽식 건축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나는 호수 주위를 걷기 시작했고, 지치면 호숫가에 앉아서 풍경을 바라보곤 했으며, 가져온 카메라로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풍경을 기록하곤 했다.
그날 저녁 나는 그녀에게 엽서를 쓰기로 결심했다.
마을 근처에 조그마한 우체국에서 엽서와 우표를 사서, 호스텔에서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엽서를 꺼냈다. 막상 쓰려니 글이 잘 안 써진다. 제한된 글자 수에 전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도 넘친 탓이었다.

일단 노트에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맘에 안 든다. 고친다. 여전히 맘에 안 든다. 고친다. 어느새 2시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고민이었다.
너무 글이 긴 게 문제였다. 나의 맘을 전하고 싶다. 짧아야 한다. 그리고 기억에 남을 정도로 강렬해야 한다.
수십 번을 고치고 고쳐 이렇게 글을 써 내려갔다.
"파랑.
바이칼 호수를 떠올리면 나는 이 단어가 떠오르겠지.
너를 떠올린다면.
두 번의 밤.
오해가 생기고, 오해가 풀리는.
한숨도 못 잤지.
PS. 지금 밖은 바람이 몰아치고, 눈이 내리고 있어. 나가고 싶지만 망설여져."
맘에 들었다. 나는 이 엽서를 통해 나의 마음을 전했다 확신했다.
두 밤은 우리들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것이었다.
하룻밤에는 난 그녀가 남자 친구가 있다 결론을 내렸고, 다른 하룻밤에는 아주 우연한 계기로 그녀를 통해 이는 오해였음을 알게 되었다.
첫째 밤은 괴로워서, 둘째 밤은 기뻐서 잠을 못 잤다.
그리고 추신은 내가 그녀에게 나아가고 싶지만 망설이는 나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적어냈다.

다음날 우체통에 집어넣었다. 경험상 빨라야 앞으로 한 달 후에야 엽서가 도착할 예정이다.
6월 초 에야 도착이니, 그때쯤이면 졸업도 며칠 안 남은 셈이다. 어차피 그녀와 나는 이어질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니 맘이 편해했다.
실제로 엽서는 한 달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단지 그녀의 엽서만을 제외하고.
그녀의 엽서만 2주도 안돼서 도착한 것이다. 그녀가 엽서를 받고 매우 기분이 좋았다고 내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 엽서에 내용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른 때에 도착한 엽서는 나에게 미련을 생기게 했다. 그녀를 향한 나의 마음은 더 이상 억제하기 힘들었다.
이토록 나를 설레게한 그녀를 난 너무나도 늦게 만난 것이다. 난 이 사실을 지금 이 순간 더더욱 체감하며 슬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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